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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개인과 시대의 진보가 유쾌한 웨스트엔드 스타일 마당놀이 ‘뮤지컬 제이미’

기사입력 : 2020년 07월 29일 20시 52분
ACROFAN=류재용 | jaeyong.ryu@acrofan.com SNS
지난 2017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팬들에게 선보여졌다는 ‘에브리바디스 토킹 어바웃 제이미(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 이하 제이미)’는 현지에서의 뜨거운 호응으로 국내 뮤지컬 팬들에게도 숱한 궁금증을 일어나게 했던 공연이었다. 특히 극을 관통하는 주제인 ‘드래그 퀸’이 국내에서 아직은 편견이거나 희화화된 시선으로 보는 편인 것이 사실인 우리나라에서, 또 이를 주역이나 조역으로 삼은 공연들이 사회와 시대의 어두움을 투영한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을 상기하다보면 드래그 퀸을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가 너무나 흥겹고 밝단 현지 평가들이 호기심을 품게 만들었다.

서로 성역할을 달리하는 것은, 사실 즐거움의 한 방법으로서 꽤 흔한 것이긴 하다. 학교에서 축제를 할 때 서로의 성별 스타일을 바꿔 하며 웃고 즐기는 것은 매해 있는 일. 전통적으로도 한국에서는 남사당패가, 일본은 가부키와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중국에서는 경극이 예술의 한 카테고리로 다뤄지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역할의 반전은 한 순간의 유희라는 어느 일정한 선을 넘어설 때에, 아직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경건주의와 충돌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이는 여전히 보수적인 가치로서 유지되는 관념이고, 이에 부딪히면 험한 일 벌어지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그나마 사회운동, 인권을 주장하는 여러 주장들의 명멸 속에서 이러한 경향이 개인의 취향이나 정체성으로 차근차근 인정받아 왔다. 한국에서 드래그 퀸 주연극으로 알려진, 그 어둡기로 소문난 뮤지컬 ‘헤드윅’의 시대 배경에 따져 본다면 근 40여년은 훌쩍 지난 시간. 그 동안 시대의 변화가 헛되지 않았는지, 이제 같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어도 행복한 게 당연한 시대가 왔다!

▲ 웨스트엔드 아폴로 극장을 부흥시켰단 바로 그 뮤지컬, ‘제이미’가 영국 외 국가에서는 최초로 한국에서 장기 공연에 돌입했다. (제공 : 쇼노트)

▲ 시놉시스만 보고도 ‘한국에서는 딱 이 분 이야기다’ 싶었던 인물이 주연으로 나서면서, 국내 흥행은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공 : 쇼노트)

■ 이제는 다함께 즐겁게 웃으며 축복해줄 수 있는 이야기

‘제이미’의 이야기는 실화에 기초해 있다. 극 전면 나선 제이미 켐벨,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가렛 켐벨 모두 실존인물이다. 애초에 제이미 켐벨이 공연에서 쓰인 이야기들처럼, 졸업행사인 프롬 파티(Prom Party)에 드레스를 입고 나가려던 시도를 방송국에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하며 매체산업계로 일을 키워 끌어 올린 사안이다. 스스로의 바램을 위한 매우 영리한 선택이었고, 덕분에 그 스스로 두려워했던 폭력과 억압을 피해내 결과적으로 유쾌함이 가득한 결말을 유도해 냈다.

제이미가 보여주는 유쾌하고 훈훈한 결말이라는 것이, 말이 쉽지 사실 여기까지 오기에 역사적 사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뮤지컬 하나로 좁혀 봐도, 아마도 시대의 변화를 논하자면 ‘헤드윅’과의 비교가 적절하겠고, 연령대에 따른 차이는 ‘킹키부츠’를 상대로 연상하기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 삶의 무게가 사람을 누르는 그러한 이야기를 그린 것. 의무교육에 급식이 당연한 세대원으로서 ‘크면 뭐하나’ 또는 ‘졸업할 때 뭐하나’ 같은 훈훈한 고민은 예전에 나온 공연에 빗대 보기에 어색하다. 냉전 시대에 제작된 공연들과의 비교는 다른 테마의 것이겠고, 그래서 그나마 더 요즘과 빗대볼 이야기다 싶은 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정도다.

탄광 노동자 아들이 훌리건이 아니라 발레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집 나간(...) 공단 노동자의 아들이 드래그 퀸 하겠다고 덤비는 것이나, 젊기엔 어린 소년들의 자기 기분을 한껏 내는 과정을 그린 것이 그 영화와 이 뮤지컬이겠다. 그런데 이 둘도 은근히 20년 가까이 시차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처 수상 시절보단 요즘이 그래도 살기 더 나아졌다는 기색이 완연하다. 물론 공통점은 있다. 어머니의 뚝심 넘치는 아들 사랑. 때론 눈물 짖고 때론 성내더라도, 한결 같은 사랑이 그의 아들을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이끌어 간다.

‘빌리 엘리어트’보다 ‘제이미’가 더 좋은 여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친구들과 선생님이다. 다들 쿨하다, 어떻게 보면 무서울 정도로. 원작 다큐멘터리와는 캐릭터 해석이 상당히 다르다곤 해도, 공연에서 그려지는 제이미의 친구들은 그들이 품은 성별, 종교, 사상, 계층 등등의 상징이 가진 클리셰를 무서울 정도로 제이미 좋으라고 깨기 바쁘다. 특히나 제이미의 드레스와 힐을 응원하는 건 무려 이슬람 교도. 극 후반까지 무언가 판을 깰 듯 안 깰 듯 긴장감을 높여가던 훌리건 청년조차 같이 놀기 바쁜 사람으로 변신한다. 그 와중에 선생님은 급여생활자의 본분에 충실하고. 또 마초들이 마음 한켠에 숨겨왔던 무언가를 찾는 과정마저 이 와중에 슬쩍 끼워 넣어져 있다.

▲ ‘소년’은 다 늙은 아저씨에겐 이미 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도 같다. 괜히 자기 옛날 보는 거 같으면, 그래서 더 자기가 원했던 그 작은 도움 하나가 무언지 금새 직감한다. (제공 : 쇼노트)

▲ 어머니의 사랑이 직접적이고, 끈끈하다. 다들 공연 보고 집에 가면 효도해야 되겠다 싶을 정도로, 배우의 내공이 엿보이는 연기와 넘버들이 충만하다. (제공 : 쇼노트)

■ 서로를 구하고 서로를 구원하는, 새로운 세대에 바랄 희망을 담은 ‘제이미’

피상적으로 볼 경우, 성적 취향이 나름 있는 한 소년이 졸업파티에서 소원성취하는 이야기로 가늠할 수 있다. 주위에서 특별히 반발이나 비난을 하기 보단, 그런가보다 하며 자기들까지 가면 벗을 틈만 노리는 게 나름의 유머. 그런데 이러한 면모가 왜 당연한가에 대한 해답 역시 극과 넘버 중간중간에 숨겨져 있다. 분명 이게 싫고, 또 외면하고 안 보고, 방해할 틈이 생기면 바로 치고 들어와 노리는 그런 적개심의 편린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그걸, 모두의 이해와 관대함이 뒤덮어 버린다.

분명 작은 공연장임에도, 관객들 모두가 함께 박수 치고 노래하며 함성을 지를 수 있는 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희극으로 보이고, 노래와 춤마저 K-POP 같아 보기도 좋고 떼창하기도 은근슬쩍 편하다. 이런 와중에 ‘제이미’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스테이지 위 배우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로 한정 짓기 보단, 누구나 투영할 수 있는 경험과 사고의 중첩이 어쨌든 제이미의 이야기에서는 해소되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는 데에서 발현된다.

한곁같이 자식 잘 되길 바라는 어머니가 있다. 하고 싶은 거 해보겠다는데 돈 걱정 하지 말란 동네 아저씨가 있다. 집안이고 종교고 180도 달리 가는 게 당연한데도 그건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 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인가? 이미 제이미와 같은, 아니면 제이미처럼 되어 가는 관객들이 객석에 있다면... 제이미는 단순히 떠들썩한 뮤지컬 공연 하나 잘 본 게 아닐 것이다. 누구에겐 추억이겠고, 누구에겐 바라는 호산나일지도 모른다.

▲ 무대장치 보단 소품으로 클리셰와 오브젝트에 의미를 다중으로 겹쳐 놓아서 따져 본다면 파볼 꺼리가 무궁무진. (제공 : 쇼노트)

▲ 극에 몰입해,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경험이... 마치 그 옛날 우리나라 마당놀이 같다. (제공 : 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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