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처럼 ‘사가(Saga)’라 지칭해도 될법한 그 자체로서의 마일스톤을 가진 이야기랄까, 단순히 내용만 갖고 볼 것이 아닌 것이 시대상이나 역사적 흐름, 담론 등 상당히 거대한 배경이 켜켜이 쌓인 게 본 극의 특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5공화국이 들어서던 시기에, 천조국발 ‘하루 8시간 근무’가 떡하니 제목으로 들어선 노래와 영화가 한국에 들어온 때문에 노동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전해진다. 당시 80년대 학번들은 빌보드 1위 팝송과 코미디 영화로 치장한 사상물(?)에 감명을 받고 미국 화이트컬러들의 삶을 동경했다는 건 꽤나 유명한 후문.
43년 전 노래, 41년 전 영화에서 당연시했던 수준에 여전히 못 미치고 있는 우리나라 노동환경을 생각한다면 첫 발표 당시의 국내 충격은 이루 가늠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황금기로 추억되는 1970년대 대도시 오피스 배경임에도, 현재로부터 반세기 전에 시간 외 근무 자체가 몰상식으로 치부되는 것부터가 참으로 대단. 거기에 스토리라인이 여성의 약진과 기존 기득권에 안주할 수 있었던 남성 노동자들의 깨어있는 연대로 이어지는데다 행동가 커플까지 탄생해 30년 넘게 해로한다는 에필로그까지 나올 정도로 굉장히 해피엔딩 일변도로 흘러간다. 물론 스토리라인에서 현실의 엄혹함은 ‘분식회계 해 횡령한 사장이 나쁘다’ 하나로 몰아서 끊고 간 탓에, 여기에서 비현실성이나 비판적인 견해들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달리 보자면, 그리 끊고 간 유쾌한 엔딩의 코미디니까 상업적으로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작품의 생명력과 흥행이 이어진 측면도 있다. 대중들은, 자신의 삶이 투영되면 될수록 해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이 강해지니 말이다.
영화를 기반으로 뮤지컬화가 여러 차례 보강되어 온 관계로 스토리가 같다지만 영화와 같은 구조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백인일색이던 영화에서 흑백 인종의 공존으로 캐릭터 구도가 변화되었다. 특히 주요인물 셋 중 띠동갑 급 연하남과 연을 맺는 미망인 외엔 둘은 흑백 커플로 밸런스가 맞춰졌다. 그리고 이러한 ‘밸런스’는 극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전제가 되는 부분으로 작용된다.
보이는 측면에서의 밸런스라면, 여성이 남성보다 일을 더 하는 형태를 취한다. 씬 전환이 될 때 스테이지에 올라온 각종 소품들을 배우들이 직접 옮기는데, 이 때 더 크고 무거워 보이는 건 여성들이 주로 밀고 들어 옮긴다. 또 중독이나 히스테리 등등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남성 보다 여성들의 역이다. 여기에 남성들이 기득권을 누리는 시대라고 하기엔, 대다수의 남성들은 새초롬한 군상들로 다뤄진다. 특히나 사랑하는 연상녀에게 대쉬하는 남성 회계사를 보면 전통적인 남녀 상이 반전되어 연기된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겠다.
들리는 측면에서의 밸런스는 3인방에 흑인 연기자 1인이 들어온 지분, 즉 3분의 1에 해당되는 게 있다. 본래 영화는 원곡을 조금 빨리 돌린 수준의 컨트리팝 기반. 그런데 뮤지컬에서 합창은 흑인영가 가스펠 분위기가 그득하고, 솔로 넘버는 소울 파워가 넘친다. 극 제목과 같은 9to5 노래 역시 유튜브에서 돌리 파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테네시 컨트리팝 풍이라기 보단, 남부 재즈 같은 음율로 속주로 곁들여진다. 직접 본 극을 보기 전에 그 옛날 유명했던 노래들로 쥬크박스 뮤지컬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현장에서의 흥겨운 분위기는, 익히 아는 그 노래들이 꼭 그렇지 않아서가 아무래도 크게 작용된다.
부가적으로 정치적이랄까 하는 부분에서의 밸런스도 일정 지분 정도로 시도되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같은 여성 둘이 커플링되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극중에 삽입된 유머 코드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EU 탈퇴 전후 영국 내각과 관련된 게 스쳐 지나간다. 굉장히 인권적인 내용이 제목에서부터 박힌 탓에 따로 ‘PC’할 일 없지 않나 했는데, 그 와중에 대사로 액션으로 치고 지나가는 게 그런 쪽이다. 지나간 일이니까 영미권 대중들이 밈 차원으로 소비하는 그런 수준이어서 특별히 주장이랄 건 아니겠지만, 시공간이 ‘1970년대 미국 대도시’ 특정되어 있는 본극에서 요즘 분위기를 어느 정도 가미한 그런 풍자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소극적으로 현대화를 녹인 것은, 극이 다른 담론들로 퍼지지 않기 위해 건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이 역시 밸런스의 연장인데, 이를 위해 돌리 파튼이 영상으로 직접 개입한다. 나레이터로 오전 9시 25분과 오후 1시에 나타나 이 극이 ‘1970년대 미국 대도시 오피스 활극’임을 지정하고 상기시킨다. ‘40여년이 지났지만 미국이든 미국이 아니든 그 때보다 과연 무엇이 더 나아졌는가 하는’ 그런 류의 담론은 극을 보는 입장에서 생각을 쓸데없이 많아지게 한다. 한 마디로 흥행의 적이랄까. 그래서 미리 ‘이건 그냥 옛날 옛적 오피스 코미디 활극’이라 주지시키고 간다. 마지막 오후 5시에 등장해서는 에필로그로 해피엔딩을 전하는데, 이때에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그리지 않는가?’하는 화두를 은근히 던져 그 쪽으로 몰고 간다. 나아지는 삶을, 또 세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합일시켜서 딴 생각 드는 걸 미리미리 막아두는 느낌이다.
▲ DIMF 현장에 가게 되거든, 다른 뮤지컬들도 챙겨보는 여유를 가져봄을 추천한다. |
‘뮤지컬 나인 투 파이브’의 아시아 프리미어 공연이 대구에서도 삼성그룹 창립지에 소재한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본 극도 상당한 내력이 있는 입장인데, 오리지널 내한 초연까지도 ‘사가’의 한 자락 장식할 무언가가 또 생긴 셈이다. 거기다 개막작 유치 등등에 조직위원회에서 꽤나 공 들인 덕분에 한국식 영어 ‘풀 파워, 풀 컨디션’으로 피지컬 100%로 돌아가는 오리지널 내한 뮤지컬을 보는 감동이 상당하다.
괜히 관람 소감이 ‘명불허전 웨스트엔드 퀄리티’라고 요약되는 게 아니랄까. 이건 사실 영미권의 유명 뮤지컬 오리지널 공연의 특징이라, 본극 하나로 묶어 규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다. 차원이 다른 피지컬로 춤이 아닌 무슨 기계체조를 하며 라이브로 온갖 기교가 들어가는 힘 넘치는 넘버를 숨 쉬듯 불러 젖히는데, 이 분들이 개막작이라고 더 힘쓴 모양인지 해외 가도 이렇게 공을 들이는 공연은 참으로 흔치 않다.
공연이 끝난 뒤 이어지는 여운을 감안하자면,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사상최고의 개막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현재 확정된 일정 후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는 계획 없고, 이번에 극을 선보인 팀들이 최고 베테랑 그룹이라 영국 귀국하면 런던 이후 자국 순회공연 해야 해 한동안 다른 나라 공연 못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렇다보니 ‘9 to 5’의 런던 웨스트엔드 퀄리티가 뭔지 보고 느끼고 싶다면, 아시아 프리미어 현장인 대구로 당장 가서 보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Copyright ⓒ Acrofan All Right Reserved.